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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월간 영감 2020년 2월호

 

 

월간 영감│2020년 2월호

소소한 에세이 모음집, '월간 영감'이 돌아왔다.

visla.kr

조커

 

유년기 시절, 만화나 영화를 보며 또래 친구들은 주인공을 응원할 때 나는 유독 악당의 편을 들었다. 주인공이 변신할 때 친절하게 기다려 준다든지, 주인공에게 수없이 패배하고 돌아오는 부하들을 끝까지 믿고 기다리며 챙겨주는 악당들의 수장 그리고 주인공 5명이서 악당 한 명을 후드려 패는 모습을 봤을 땐 솔직히 선과 악이 뒤바뀐 게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악당’이라고 정해진 저들 또한 저마다의 명분이 있었다. 결국은 이념의 차이 때문에 그들은 그저 대립했을 뿐이다. 그런 이유로 내가 DC보다 마블을 좋아하는 이유 또한 DC는 선과 악을 분명하게 긋는 반면에, 마블은 히어로와 빌런의 영역을 분명하게 긋지 않는 점이 맘에 들어서다. 그들은 때때로 오히려 빌런보다 더 빌런스러운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히어로 코믹스에서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는 DC의 조커다.

 

서론이 길었지만, 사실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얘기는 조커보다는 그 전의 아서 플렉에 관해서다. 작년에 개봉한 호아킨 피닉스 주연의 “조커(Joker)”는 나에게 어떤 영감을 주는 영화였다, 이전까지 나에게 최고의 조커는 “다크나이트(Dark Knight)”의 히스 레저였는데, 새로운 조커를 본 후 그 순서를 정하기 어려워졌다. 각자 다른 매력이 존재하더라도 “조커”라는 영화에선 아서 플렉이 왜 조커가 됐는지 명분을 알 수 있게 해 줬기 때문이다. 물론 테러를 일삼거나 살인을 저지르는 행위는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조커가 아닌 아서 플렉의 인생은 나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공감을 살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 또한 지금껏 행복하기 위해 살아왔지만, 언제나 힘들고 개 같은 하루하루가 대부분이고 잠깐씩만 행복했다. 은연중에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바랐지만, 이제와 보니 10대 때의 나도, 20대 때의 나도, 30대인 지금도, 이유가 다를 뿐 힘들고 개 같은 일은 항상 일어나고 그건 내가 어떻게 하려고 해도 불가항력적으로 따라오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개 같은 일들은 항상 내 도처에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아서 플렉과 달리 조커가 될 수 없는 점은 나는 이 개 같은 일들이 나뿐만 아니라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패시브로 가져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이 많든 적든 얼굴이 잘생기건 못생기건 그들 저마다의 개 같은 일은 항상 벌어질 거고 다만 다른 건 얼마나 그 개 같음을 잘 버티고 이겨내느냐, 그 문제인 것 같다. 행복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소중한 이유는 매일매일 개 같은 일만 겪다가 가끔씩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인 것처럼. 늘 발생하는 개 같은 일을 잘 버티고 이겨내는 것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 아닐까?

 

권순환